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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깎아야 한다 |
나는 깎아야 한다.
그게 내 일이다.
많이 깎을수록 일을 잘 하는 거다.
안 깎거나 적게 깎으면 내 일을 잘 못한 것이다
이발사는 아니지만, 머리를 깎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에 내 역할은 깎는 거다.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무조건 깎아야 한다.
깎지 못하면 내가 짤린다.
내가 깎지 않으면 우리 회사의 이익이 줄어든다.
내가 깎은 만큼 우리 회사는 이익이 늘어 난다.
견적가가 비싸면 당연히 깎아야 한다.
하지만 싸다고 해서 안 깎는 것도 아니다.
싸구려도 깎고 최저가도 또 깎는다.
“깎아!”
“더 깎아!”
입사 때 구매팀에 배치 받은 후 귀에 굳은 살이 돋도록 들은 말이다.
우리팀의 지상명령이자 목표다.
나는 그렇게 7년 동안 계속 깎아 왔다.
깎은 데는 선수다. 도사가 됐다.
안 깎아 본 적이 없다.
납품업자치고 안 깎인 데가 없다.
납품업자는 깎일 것을 예상하고 아예 견적가를 깎일 만큼 올리는 수법을 쓴다.
그래서 깎을 때에는 심할 정도로 팍 깎아야 한다.
터무니 없을 정도로 막무가네로 깎아야 제 가격에 납품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납품업자가 이득을 많이 볼수록 우리 회사는 손해 볼 게 틀림없다.
깎을 바에는 아주 독하게 깎아야 한다.
살살 깎으면 깎은 티가 안난다.
납품업자한테야 욕을 먹겠지만 우리 팀장이며 재경본부장님한테는 칭찬을 받는다.
“악바리 과장, 참 일 잘해.”
“악 과장은 구매팀 체질이야.”
그래서 나는 오늘도 깎으러 중회의실로 가는 길이다.
중회의실에는 벌써 CRM 시스템 구축 컨설팅 업체에서 영업사원 두 명이 도착해서 마케팅총괄실 공 차장과 함께 테이블에 둘러 앉아서 소근거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팍 깎아!’
우리팀 업무신조를 속으로 되뇌었다.
내 버릇이다. 납품업체 영업사원을 만나기 직전에 ‘깎아!’라는 지상명령을 속으로 외친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깎은 폭이 훨씬 더 커진다, 팀장님께서 감동하실 수준으로.
“과장님… 이 금액 이하로 깎은 건… 저희로서는… 어휴… 정말 곤란합니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견적금액을 얼마나 할인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나이가 젊어 보이는 납품업체 직원이 얼굴이 빨갛게 변하면서 더듬거렸다.
참고적으로 나는 납품업자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다. 견적총액에도 마찬가지. 내가 관심을 갖는 건 오로지 얼마나 많이 깎느냐이다.
“아니, 납품 한 두 번 해 보셨어요? 견적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구매팀이 어디 있습니까. 저희 팀 임무는 깎는 겁니다.”
“그건 잘 알겠는데요, 저희는 공 차장님께서 예산문제로 고민하신 점을 감안해서, 다른 회사에서 받았던 컨설팅 피(fee)보다 25%나 적은 금액으로 견적을 제출했습니다. 이미 25%나 깎아드린 셈이라는 거죠.”
“아아. 그래도 당신네들 남으니까 납품하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25%는 공 차장님한테 깎아 주신 거고, 저한테도 깎아줘야죠. 안그러면, 제가 여기 뭐하러 나타납니까, 나원참!”
세게 나가야 한다. 납품업자 눈에는 내가 독하고 나쁜 놈으로 보이겠지만 그래도 난 더 깎아야 한다. 불쌍해도 어쩔 수 없다.
내 목소리가 좀 컸는지, 아니면 독기 서린 내 눈초리에 질렸는지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공차장을 쳐다 보며 숨만 쉬고 있었다.
아마도 공 차장의 지원사격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공 차장이야 예산지출에 책임은 없고 CRM 도입의 성공여부에 관심이 쏠려 있겠지. 사전작업 중에 납품업자들하고 인간적으로 좀 친해져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계약건은 내 손을 거쳐야 한다. 그러려면 더 깎이지 않고는 절대 나를 통과할 수 없는 일!
나이가 좀 더 먹은 듯한 영업사원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저도 협상을 많이 해 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려서 기분 드럽습니다. 품질이나 기술력, 납기, 에이에스는 전혀 감안하지 않고 가격만 언급하시면… 저희가 제공해드리는 솔루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인데… 참 어렵군요.”
난 순간 열을 받았다. ‘솔루션’이니, ‘가치’라는 숫자가 아닌 철학 같은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뒤집혀 버렸다.
“아니, 그런 건 말씀 하지 마시고, 얼마나 깎아 줄 수 있는지 말씀하시라니깐요!”
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좀 심하게 말을 했더니 공 차장 안색이 안절부절 표정이 되었다.
“그럼 이렇게 하겠습니다. 제출한 견적가 이하로 더 할인을 해드리려면 저희도 회사 윗선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희한테 시간을 좀 더 주시죠. 얼마나 더 할인해 드릴 수 있는지 수일내로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두 명의 영업사원이 돌아 갔다.
나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공 차장이 풀 죽은 소리로 자기 사정을 좀 봐달라는 식으로 말했다.
“이봐, 악바리. 이 CRM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는 미국 본사에서 지시한 방식대로 추진해야 하는데 이 알다마다컨설팅사가 최적이라고 중역회의에서 이미 결정됐고, 이번 주에 계약하지 않으면 착수시기가 한 달이나 늦어져, 한 달이나. 그러면 영업쪽에서 얼마를 손해 보는지 알기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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