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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얼굴이 명함입니다 |
손 대리가 몇 달간 고생 고생해서 어렵게 개척한 가망고객을 만나러 갔던 때의 일이다.
그 고객사에서 다음주에 경쟁 프리젠테이션을 하기 전에 오늘 사전미팅을 좀 했으면 하는 요청이 있었고, 팀장님께서 나한테 손 대리와 함께 방문해서 제안요청사항을 자세히 알아 오라고 오늘 아침에서야 지시하셨다.
예고가 없는 동행영업이라 내 일정이 꼬이고 말았지만 열심히 하고 있는 손 대리의 얼굴을 보니 막상 뭐라고 나무랄 수도 없었다.
“11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30분 후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선배님.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거든요.”
“알았어, 임마. 미리미리 좀 얘기하지. 내 일정 조정 좀 하고… 그 회사한테 줄 자료나 이상없이 준비해.”
“걱정하지 마세요 헤헤.”
30분 동안 정신이 없었다.
11시에 만나기로 했으면 점심시간 전에는 상담이 끝나겠지만 그래도 우리 회사 근처에서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후배녀석 한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연기해야 했다.
점심식사 후에 오늘 2시에는 분기말마다 본부장님께서 주관하시는 분기 결산 및 전략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서 각 팀의 과장급들이 티 타임 형식으로 회의를 갖기로 한 것도 1시간 정도 시간을 조정하자고 여기저기 양해 전화를 걸어야 했다. 다른 팀의 과장들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오늘 퇴근 후 술 한잔 내가 사는 것으로 타협을 지었다.
전산지원팀에게 오후에 제출하기로 했던 홈페이지 상품 소개 개선안은 오늘 오전 중에 마무리해서 제출하려고 했었는데, 예정에도 없는 외근이 생겼고 오후에는 전략회의를 위한 과장급 준비회의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내일 오전 중에야 가능하니 사정 좀 봐 달라고 매달려야 했다. 내일 오전 중에 제출하지 않으면 ‘알아서 하라’는 엄포를 듣고 나서야 겨우 굵직한 일정 조정이 끝났다.
손 대리는 벌써 가방을 들고 내 옆에 서 있었다.
“서둘러야…”
“알았어 알았어. 너 때문에 내가… 으그… 뜨자!”
5분전에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겨우 늦지는 않았다. 만나기로 했다는 12층 접견실로 헐레벌떡 올라갔다.
그들은 정확했다. 세 명 모두 벌써 접견실에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을’이 도착해서 안내 데스크에서 도착했다고 구내전화를 걸어야 그때부터 참석자들을 불러 모으고 결국 10분 후에나 상담이 시작되는데 이들은 달랐다.
손 대리가 나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그런데, 아뿔싸! 명함이 없는 거다, 양복 저고리 주머니에도, 가방 안에도, 심지어 업무 다이어리 안쪽에도. 어디에도 내 명함이 한 장도 없는 것이었다. 너무 서둘렀던 게 탓. 나로서는 초면인데 이거 낭패다.
세 명은 모두 내 앞에서 줄지어 한 손에 명함을 들고 내가 명함을 꺼내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할 시간을 기다리며 없는 명함을 찾으며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어어…”
“명함이 없으신 모양이죠?”
“아, 아닙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 따라…”
순간 예전에 누구한테 들었던 짤막한 개그가 머리를 스쳤다.
순진한 대학생 몇 명이서 기차여행을 떠났다. 자리를 찾아 짐을 선반에 올리고 나서 끼리끼리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검표원이 와서 표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런데 한 학생이 표를 잃어 버렸는지 주머니를 계속 뒤지면서 안절부절이었다. 검표원이 무임승차는 운임의 몇 배를 현금으로 배상해야 한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그때 표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그 학생이 ‘표가 있었는데 잃어 버린 겁니다. 정말이예요. 저는 거짓말을 못해요. 제가 무임승차나 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차장님, 제 얼굴을 보십시오, 제 얼굴이 승차표나 다름없습니다’라고 했더니 검표원이 하는 말 : ‘그렇게 보이는군. 하지만 어쩌겠나, 승차표에 구멍을 내는 게 내 일인걸. 자네 얼굴에 구멍을 낼 수 밖에.’
지금 내 상황이 표를 잃어 버려 무임승차로 오해 받은 그 학생의 입장일 것이다. 그래서 이 어색한 분위기를 빠져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혹시, 이 근처에 복사기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아니, 왜요? 복사기는?”
“드릴 명함이 없으니까 대신에 제 얼굴을 복사해 드리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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