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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의 니즈는 아주 먼 곳에 |
어 과장의 영업 스타일에 답답함과 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은 차가 톨 게이트를 막 빠져나왔을 때였다. 고속도로에서 이미 시간이 지체되었었다. 교통 사고의 여파로 예정된 시간에 도착 못할 것이 뻔했는데, 국도로 접어 들어서자 또 길이 막혔다.
“어 과장님, 이때 쯤에 전화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 왜요?”
“지금 10분 전인데, 아무리 빨리 가도 정각에 도착 못합니다. 좀 늦는다고 전화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 거기 구매과장은 붙박입니다. 어디 나가질 않아요.”
“아니, 못 만날까봐 그러는 게 아니고,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를 하는 게 비즈니스 매너잖아요. 약속을 안 했으면 몰라도 우리가 간다고 시간 약속을 했는데 전화도 없이 늦으면 그 사람 기분이 안 좋아질 거 아닙니까.”
“어… 전화 안 해도 돼요. 어… 한 두 번 만난 사이도 아니고, 이 업계가 다 그래요.”
어 과장은 끝내 전화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고집이 있구나 생각되었다.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었다. 아무리 친한 고객이라고 해도, 업의 특성상 거래가 반복될 수 밖에 없어서 서로 코가 꿰인 관계라고는 하지만 그럴수록 매너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상대방의 시간과 업무를 존중해 주고 있는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 프로답지 않을까.
영업팀에서 팀장 바로 다음으로 베터랑인 어 과장이 고객과 약속한 시간을 하찮게 여기고 늦는다는 양해 전화를 하지 않는 것에서 그의 수준을 넘볼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1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밖에서 보기에는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을 주었던 공장. 그 공장 2층의 총무부 접견실은 적막감에 싸여 을씬년스러웠다. 낡아 빠진 파티션들이 일렬로 반듯하게 늘어서서 있고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몇 명뿐. 텅 빈 듯한 적막감은 이삿짐을 빼고 있는 사무실에 들어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파티션 너머로 어 과장이 눈짓 인사를 하는 남자가 있었다.
“어… 저 사람이 구매과장입니다.”
어 과장이 나한테 속삭이듯 알려 주었다.
“아, 네에.”
잠바 차림에 가칠 한 얼굴빛에 굳은 표정. 썰렁한 사무실 분위기와 그의 표정이 어찌 그리 잘 어울리던지…
반갑지 않다는 뜻인지, 골치 아픈 상대가 왔다는 심정인지. 마지 못해 다가온 그는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과장은 어정쩡했다. 나를 소개하지도 않았고, 그에게 건네는 인사말도 시원치 않았다.
“어… 바쁘시죠?”
입에 발린 흔한 말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 네에. 으음… 이쪽으로 가실까요?”
그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넓은 사무실 한 쪽 끝에 놓여 있는 6인용 테이블이었다. 에너지 절약 차원인지 그 쪽은 형광등이 하나 걸러 하나씩 꺼져 있어 어두컴컴했다. 테이블 위에는 먼지와 얼룩이 군데군데 추상화를 그려 내고 있었고, 똥파리 몇 마리가 그 위를 앵앵 거리면 비행하고 있었다. 이상했던 건 그래도 냄새는 안 났다는 것.
그가 우리한테 의자를 권했다. 앉은 후에 통성명을 하려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좀 그래서 내가 먼저 나섰다.
“초면입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명함을 꺼내는 동작을 취하자
“아이고, 잠깐만요. 제가 명함을 안 가지고 있어서… 아참, 차는 뭘로 하시겠어요?”
그는 업무용 다이어리를 테이블에 놓고 자기 자리 쪽으로 허겁지겁 걸어 갔다.
약속 시간에 늦겠다는 전화를 하지 않는 어 과장이나 새로운 인물과 만나는 자리에 명함을 안 가지고 나타나는 구매과장이나 돗진갯진 아닌가…
“어… 이 분은 본사에서 컨설팅을 하고 계시는 분인데, 어… 고객들의 공장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같이 왔습니다.”
“아, 네에.”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두 분께서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있다가 공장 견학 좀 해도 괜찮으시겠죠?”
“아, 네에.”
사실 내가 따라 간 이유는 영업을 어떻게 하는가 모니터링하기 위한 것. ‘공장견학’은 고객한테 불편을 주지 않으려는 선의의 위장 전술이었다.
“어… 요즘 어떠세요?”
또 어 과장의 알맹이 없는, 고객을 편안하게 해주는(?) 오프닝 멘트가 튀어 나왔다.
“늘 그렇죠 뭐.”
구매과장의 ‘멍군’은 명언이었다.
(그렇게 물어 보니까 그렇고 그런 대답만 나오지.)
“그래,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맹숭맹숭한 대화가 너저분해 지자 오히려 구매과장이 어 과장의 급소를 찔렀다.
“어… 그냥… 안 뵌지도 오래 되었고, 어… 요즘 오다가 어떤지. 또 어… 혹시 K사는 요즘 누가 들어 오나요?”
“매일 오는 그 친구 있잖아요. 오전에도 왔었어요.”
“어… 그래요? 어… 와서 뭐라던가요?”
“XL재는 키로당 50센트 깍아 줄 테니까 다음 오다는 자기네한테 달래요.”
“어… 50센트나 깍아 준다고 해요? 어… 그 가격이 나오나? K사 막 나가는군.”
“요즘 다들 난리죠.”
“어… XL재의 경우 K사 품질은 메이저 4사 중에서 최악인데요. 그 아이템은 저희 품질이 최고라는 거 과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품질이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서 거기고, 시장이 다 죽은 상태니까 가격에 매달릴 수 밖에 없어요. 우리도 살아야 하니까요. 이젠 누가 오래 버티느냐인 것 같아요.”
“어… K사 그 단가 남는 거 하나도 없을 텐데 왜 그러지.”
“T사에서도 K사 단가를 물어 보더라구요. K보다 무조건 10센트 더 싸게 줄테니까 아이템 좀 늘리자고 매일 전화 와요.”
“어… 그럼 얼마 깍아 드리면 우리한테 물량을 주실껍니까?”
어 과장은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남들이 깍아 준다면 우리도 깍아 줄 테니 우리랑 거래하자는 식으로 가격경쟁 진흙탕에 뛰어들었다.
“아니요. 이제 저도 그렇게는 안 하려고 합니다. 전에는 누가 얼마에 준다는데 당신네는 얼마에 줄꺼냐고 역으로 제안을 했는데 이젠 양심상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어… 과장님, 그러지 마시고 T사하고 K의 단가를 알려 주세요. 그러면 저희 팀장님께 말씀드려서 그 보다 싼 가격에 넣을께요.”
어 과장은 구매과장한테 최대 경쟁사인 T사와 K사의 단가를 알아 내기만 하면 이번 달 물량을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는지 자꾸만 경쟁사의 단가 정보를 알려달라고 바지 가랑이 붙잡고 애원하듯 보챘다.
“더 이상 그렇게는 안 한다는까요. 물량을 늘리시려면 견적을 넣으세요. 4사 견적을 비교해서 저희가 선택하겠습니다.”
“어…”
그 때 투피스 유니폼 차림의 여직원이 차를 내왔다.
세 명 모두 말 없이 어색한 분위기로 여직원의 차 배급을 빤히 쳐다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멀리 오셨는데 저희 공장 라인 한 바퀴 안내해 드릴까요?”
구매과장의 그 한 마디가 녹차를 거의 다 실 때까지 계속된 애매한 분위기에서 세 명을 구원해 주었다.
“아, 그러시면… 두 분 하실 말씀이 다 끝났나요?”
적막한 고요의 바다와 같던 사무실 분위기와는 정 반대로, 좌불안석이었던 상담 장면의 분위기와는 영 딴 판으로 60여대의 직조기가 만들어내는 소음 섞인 리듬이 너무 기분 좋았다. 대화가 오가는 접견실보다 말 해 봐야 듣지도 못하는 공장의 소음이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한 건 왜일까. 귀마개를 하고 있는 직공들이 부러웠다.
우리를 배웅하는 구매과장의 표정은 매우 밝아 보였다. 그 무엇에서 해방된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 과장의 차에 올라 타고 다음 고객을 찾아 가야 하는 나는 그 무엇에서 해방된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어…’로 시작되는 그 속 터지는 상담 장면을 여전히 지켜 봐야 하는 포로의 시간이 아직도 반나절이나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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