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애원 |
압구정동에는 TV에서 얼굴을 본 적이 전혀 없는, 그렇지만 노래는 들어 봤던 오디오형 전직 가수가 운영하는 술집이 있다. 그 집은 우리 수준에 맞는 분위기 때문에 술을 좋아하는 친구 녀석하고 3차로 자주 갔었다. 한쪽에는 유리문으로 격리된 룸이 하나 있지만 룸 살롱은 아니고, 홀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데 시간이 되면 피아노 연주자가 와서 손님들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도와준다. 그래서 단란주점 같아 보이지만 손님 테이블에 앉아 시중을 드는 여자도 없으니 단란주점은 아닌… 그야말로 옛날식 까페에 노래가 가능한 양주를 마시는 술집쯤으로 생각하면 편했다. 그집 사장이 전직 가수라는 걸 알고 난 다음부터 우리는 갈 때마다 술이 좀 들어 간 후에는 직송을 부탁드렸다. 편안한 인상에 수수한 목소리의 그 가수 사장님은 마이크를 잡으러 피아노 옆으로 가기 전에 언제나 쑥쓰러운 듯한 웃음을 보여 주었다.
“목이 메여 불러 보는…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소식이나 전해 주오.”
그 사장님은 데뷰곡 다음에는 항상 ‘Stand By Me’를 불러 주었다. 원곡의 가수에게 직접 듣는 ‘애원’ 또, 내가 좋아는 하지만 마이크를 잡고 직접 부르기는 애매한 Stand By Me를 알딸딸하게 취해 있을 때 듣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술꾼의 어떤 행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12시가 되기 전에 2차를 마치면 그 집을 자주 갔었다.
그 술집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몇 번째 갔을 때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가 그 집을 출입하기 시작한 때부터 그녀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녀의 첫인상은 곱게 성숙한 중년 여성 그 자체였다. 짙은 청색의 스커트 벨트 안으로 긴 팔의 하얀 블라우스를 단정하게 집어 넣어 날씬한 몸매를 얌전하게 드러냈고, 웨이브가 있는 긴 머리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약간은 서구적이면서 예쁘장한 마스크를 완성시킨 상태였다. 나하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녀가 지어 보이는 조용한 미소는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에게서 흔히 느끼는 섹시함이나 유혹 보다는 일종의 편안한 휴식이라고나 할까? 하여간에 흥분된다기 보다는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마다 돌아 다니며 대화 상대가 되어 주고 주문을 받기도 하고 안주를 가져다 주기도 하는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우리 테이블에 왔을 때 이상하게도 그녀가 내 옆쪽으로 와서 앉았다. 그녀가 먼저 인사 드린다며 명함을 내밀었고, 상대방이 명함을 주면 나도 반드시 내 명함을 꺼내 주던 영업출신의 버릇이 술집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술집 여종업원한테는 절대로 명함을 주지 않는 내 친구녀석은 그런 내 행동을 나쁜 버릇이라고 꼬집어 대곤 했다.)
그 다음부터 우리가 그 술집에 갈 때 마다 그녀가 우리 테이블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단골에 대한 예우였을까? 그 덕분에 그녀와 대화를 많이 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서 아는 부분이 늘어만 갔다. 그녀는 향수를 쓰는지 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은은한 향을 썼고, 항상 단정한 모습에 말은 표준말을 쓰면서 말투도 얌전하고 차분했다. 나이는 나하고 같거나 한 두 살 차이인 것 같았고 나는 슬슬 말을 놓기 시작한 반면에 그녀는 절대로 반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늦은 밤에 술집에서 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사장님을 도와드리는 식이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녀는 술집에서 오래 일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내 기억엔 그녀를 두 번째 보는 날, 술김에 농으로 걸어 본 우리의 얄궂은 제의 밖에서 만나자는데 그녀가 좋다고 했던 것 같다. 혼자 사는 자기 친구며 ‘돌아온 싱글’인 후배들이 있는데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술이나 마시면서 놀자던 합의는 막상 당일에 내가 너무 바쁜 일이 생긴 관계로 성사되지 않았다. 그 후로 그 일은 유야무야 술기운에 서로 나누었던 실없는 농담이 되어 버렸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가 그 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여자 왜 안 나오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만 두었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때는 늦가을 쯤으로 기억된다. 휴대폰에 입력되지 않은 번호가 떴다. 여자 목소리. 전화를 건 여자가 그 술집에서 보았던 그녀라는 걸 알기까지는 내 기억을 되찾아 주는 몇 마디의 대질심문이 오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가 S생명보험에 FC로 취업을 했다는 통보였다. 그녀의 심성으로 보아 프로의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누구나 첫눈에 호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녀의 외모와 인상, 그리고 감성적인 말투는 영업 입문 단계에서 큰 힘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내가 I생명보험에서 FC로 영업했다는 걸 말해 주면서 잘 해보라고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었다. 교육을 마치면 한번 보자고, 많이 도와 달라고.
또 2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휴대폰으로 걸려온 여자의 전화. 이번에는 그녀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찾아 오겠다는 통보 전화였다. 자기가 보험 일을 시작하면 내가 많이 도와주겠다고 했다면서 이제 그 때가 왔다는 것이었다. 찾아 오는 건 좋은데 교육받을 때 배운 대로 나한테 하지 않으면 혼날 줄 알라고 엄포를 놓았다. 나를 연습상대라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세스에 따라 영업을 하라고 예고를 해 주었다. 내가 바쁘니까 점심시간을 이용하자고 했다. 점심 값은 당연히 그녀가 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연습 상대가 되어 주는 대가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프로 근성을 키워주고 싶었다.
당일이 되어 그녀는 후견인인지 트레이너라며 지극히 평범하고 펑퍼짐한 아줌마 모습을 한 선배FC를 모시고 나타났다. 나는 접견실에 두 여자를 모시고 따뜻한 녹차를 대접하면서 시작해 보라고 했다.
예쁘게 차려 입고 온 그녀는 시작부터 어설픈 아마추어 티를 냈다. 2개월 동안 도대체 무엇을 배웠는지. 배웠지만 그걸 적용하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니면 너무 친해서(?) 어색한 건지. 도무지 속마음을 모르겠다. 어린 아이처럼 보채기만 했다.
‘나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제가 왜 왔는지 아시잖아요. 알아서 빨리 해 줘요.’
그녀가 계속 웃으면서 한 말은 이런 말들 뿐이었다.
“뭘 해 달라는 건데? 코드는 나왔어?”
“아니요. 오늘은 앙케이트 세 장을 받아 가야 한단 말이예요. 얼른 써 줘요오.”
“그럼 진작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알면서 왜 그래요오.”
뒤죽박죽이었다. 접견실에서 세 사람이 자리를 잡았을 때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면서 부드럽게 시작해서 오늘 찾아 온 용건은 무엇 때문이다. 그걸 해결한 다음에 점심을 먹으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자는 둥의 방문목적을 밝히는 오프닝이 전혀 없었다.
같이 따라온 선배 FC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I생명보험에서 FC로 있었다는 말을 화제로 삼으면서 CI라는 말을 꺼냈는데 그게 내 신경을 건드렸다. 내가 FC할 때에는 CI라는 보험이 없었던 터라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못 알아 들었다. 내가 CI가 뭐냐고 물었을 때 예쁜 나의 그녀는 ‘CI도 몰라요?’라며 내가 듣기에는 FC했다는 사람 맞느냐, 무식하다, 왜 모르냐 내지는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들리게 만들었다. ‘고객한테 전문용어 사용하지 말라고 교육 안 받았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요즘 사람들 CI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정말 난 그게 뭔지 몰랐다. 그녀를 따라온 선배FC가 가방에서 상품 안내서를 꺼내서 보여 주었다. CI는 중요 질병이라는 뜻의 영어 두문자였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팜플랫 때문에 화제가 보험상품 쪽으로 튀었다. 보험에 대한 필요성을 내가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 아니 그 이전에 내가 보험에 가입한 상황이나 재정상황에 대해서 알아 보기도 전에 벌써 상품설명으로 접어들어 속도를 위반하고 말았다.
그녀의 애원에 내 신상정보를 적어 주었다. 점심을 먹고 헤어지면서 다시 찾아 올 때는 정식으로 영업을 하라고 또 경고를 했다. 헤어질 때 그녀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다음에 언제 보자는 약속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물어 보았지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또 전화하겠다는 것이 다였다.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일정을 잡겠다는 건데 그러면 프로세스가 길어지지 않느냔 말이다.
한 달쯤 지났을까? 그녀가 다녀갔다는 걸 잊을 만한 때에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마침 내가 직원의 차를 타고 우리 고객을 방문하러 가고 있는 중이어서 길게 통화하기 곤란했다. 내가 전화를 걸겠다고 했지만 일을 마치고 난 후에 난 그만 그 약속을 잊어 버렸다. 그때 내가 그 만큼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난 후에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고객사의 회의실로 막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으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 그녀는 내가 자기를 외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실망했을 것이다.
또 한 달이 지났다. 그러니까 그녀가 보험모집인 코드가 나온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날은 31일이었다. 오전 11시 30분경. 아침을 굶고 출근했기 때문에 조금 일찍 점심을 먹으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녀한테 전화가 왔다.
“저기요. 저예요.”
“어어… 잘 지냈어?”
“그냥요.”
목소리에 힘이 없고 말투에 자신감이 없다.
“두 달이 지났는데, 실적은 좀 어때?”
“남들만큼 해요.”
“아니, 그렇게 말하지 말고, CMIP가 얼마인지 숫자로 얘기해 줘야 내가 알지.”
“CMIP가 뭐예요?”
“년환산 초회보험료. 그러니까 한 달에 계약한 보험료 합계가 얼마냐구? 지난 달에?”
그녀가 대답한 숫자는 내가 FC였을 때 보다 적었다.
“첫 달에 그렇게 적게 하면 안돼. 수입이 적으면 오래 못가거든.”
“그러니까 도와달라구요.”
“또 그런 소리한다. 뭘 도와달라는 건지. 내가 가입하는 게 도와주는 게 아니라고 여러 번 말했잖아.”
“오늘이 말일이잖아요.”
“그렇군.”
“오늘 마감인데, 제가 30만원이 모자라요. 그러니까 작은 거라도 하나 들어 줘요. 꼭이요.”
“작은 거라면 얼마를 말하는 거야?”
“한 10만원 안되요?”
“내가 필요해야 들지. FC의 월간 목표를 달성하는데 도와주려고 내가 보험을 들어야 한다는 거야?”
“그럼 난 어떻게 해요오…”
“그런 식으로 영업하지 말라고 했잖아. 배운 대로 하라고 몇 번 얘기 했어. 그렇게 하면 오래 못 가. 그 회사에서 교육할 때 그렇게 하라고 했어?”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작은 거라도 들어 준다고…”
“아이구… 내가 도와준다는 걸 그런 식으로 알아 들었어?”
그녀의 마지막 그 전화가 온 날 바로 전날에 나는 이미 우리 회사 직원의 친형에게 보험을 가입했었다. 그 전에 가입했던 보험을 실효시키고, 단 한 시간 상담 끝에. 청약서에 싸인을 하던 그 날, 그리고 보험을 다시 가입하기로 마음 먹은 그 전달, 왜 그녀가 생각나지 않았을까? 그녀가 생각났었다면 그녀에게 상담할 수도 있었는데… 필요 없을 때에는 귀찮을 정도로 전화가 오고, 정작 필요할 때에는 잊혀진 그녀. 지금 그녀는 또 누구에게 애원을 하고 있을지… ‘목이 메여 불러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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