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는 것은 영원이 아니다. 끊임없이 끝없이 움직이는것, 그것이 바로 영원이다.
여래는 만물이 무상하다고 말했고 공자는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으며 서양의 아우구스트는 흐르는 물에서 발을 씻다가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씻을 수 없음을 알고 시간을 보았다.
공자든 여래든 아우구스트이든 모두 같은 것을 보았던 셈이다. 변화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영원이라고 보아도 된다.
나무에 잎이 나오면 꽃이 피게 되고 꽃이 이울면 열매가 오게 된다.
꽃이 지나가면 열매가 나오지만 잎은 여전히 가지에 달려 있으니 지나 가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말해도 될까?
아니다. 잎이 지나가면 낙엽이 떨어지고 흙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지나가는 것은 어디론지 돌아가는 곳이 있다.
돌아가는 곳을 노자는 도라고 하였고 공자는 지나가는 것 마저도 다 모르는데 돌아가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서 알려고 할것은 없다고 하였다.
공자의 당부는 몰라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가지도 못하면서 걷기를 말하지 말 것이며 걷지도 못하면서 달리지 말라는 당부를 공자는 남기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하면 제대로 사는 것인가를 먼저 알아야 함을 공자는 누누이 말한다. 그래서 공자는 삶을 모르는데 죽음을 알아서 무얼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자도 산다는 것은 지나가는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삶은 흐르는 물처럼 지나간다. 흐르는 물이 쉼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삶 또한 그렇게 흘러간다. 어디를 향해서 가는 걸까?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흘러 가는 삶을 안타까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늘의 명을 따른다는 것은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스치고 흘러가는 물처럼 맡겨 두는 것과 같다.
흐르는 물을 아무리 막아도 그 물을 멈추게 할수는 없다. 물은 흘러야 맑고 썩지 않는다. 고인물이 썩을 뿐이다.
변하는 것을 받아 들이면 흐르는 물처럼 막힘이 없다. 삶이 변하여 죽음이 됨을 받아들이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순명하게 된다. 생사의 순명, 그것은 공자가 본 흐르는 물이요, 그것은 아주 막힘 없이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흐르는 물에서 지나가는 것을 보고 막힘이나 매듭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임을 헤아리면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막가는 짓을 범하지 않을 것이고 마음 속이 훤히 트여 사람과 사람 사이가 흐르는 물 처럼 부드러울 것이다.
원수가 되고 한을 짓고 원을 맺으면서 사납게 살것은 없다. 걸림없이 유장하게 살아가는 길은 무엇이든 지나가지 않는 것이란 없다는 것을 받아 들이는 마음의 길과 같은 것일 게다. 악한 짓을 범하고 못된 짓을 저질러 대는 인간은 영영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악착같이 흐르는 물을 막아 멈추게 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이 얼마나 꽉 막혀 딱한 인간인가?
<공자의 말씀>
공자께서 냇물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
지나가는 것들은 흐르는 물과 같구나. 밤낮없이 쉬지를 않는구나.
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백 사람을 두루 아는 것보다 속을 다 털어 보일 수 있는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다. 그 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그는 곧 벗이다. 벗이란 마음이 서로 통해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되는 경우를 말한다. 달면 오고 쓰면 가는 것은 이득을 따져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다.
이런 교유는 겉으로만 친하고 속으로는 경쟁하거나 시샘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일하는 곳이 같아서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공통의 일을 위해 서로 만나는 경우이다. 이러한 만남은 동료의 선을 넘지 못한다.
벗은 허물이 없다. 벗은 상대를 사랑하므로 무엇이든 잘되기를 바란다. 만일 벗이 어떤 결함이나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으면 서슴없이 솔직하게 충고해 준다. 벗이 아니면 충고를 해주기가 어렵다. 다들 저 잘났다는 생각으로 사는 세상에 충고를 하려고 들면 고깝게 듣기 일쑤이다. 좋은 말을 하고도 감정을 사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남의 일에 관심을 쓸 것이 무어 있느냐고 하면서 자기나 잘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벗끼리는 쓴 말을 달게 받고 고마와한다. 서로의 믿음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함부로 다루어선 안된다.
서로 믿음을 소중히 갈무리하면서 북돋아 주어야 벗은 난초의 향기처럼 고고하면서도 은근해지는 것이다.
현대는 벗이 없는 세상이라고 다들 말한다. 이로우면 서로 벗이 되고 손해가 되면 서로 원수가 된다고들 한다. 이익 때문에 벗이 되는 경우는 없다. 서로 마음이 통해야 벗이 된다. 현대인은 고독한 城主(성주)가 되어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서로의 내통을 거부하는 단독자처럼 살아간다. 그처럼 누구나 벗을 소망하면서도 벗을 사귀지 못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탓일 것이다.
(자공과의 담론)
자공이 벗을 사귀는 길을 물었다. 이에 공자께서 다음처럼 가르쳐 주었다.
충고를 하여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충고를 해도 말을 듣지 않으면 그만 두어라. 지나친 충고를 하다가 도리어 욕을 당하는 경우가 없게하라.
子貢問友 子曰 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無自辱焉
(증자의 말씀)
군자는 글로써 벗을 사귀고 벗이 됨으로써 서로의 인덕을 돕고 높인다.
曾子曰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
아는 것이 많으면 인간은 자만하기가 쉽다. 아는 것만 믿고 설치다 보면 무슨 덫에나 걸리게 마련이다. 사람이 무엇을 안다고 해 보았자 한 줌의모래알에도 못미친다. 그러나 인간은 지식을 좀 쌓았다 싶으면 고집스런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려고 한다. 그래서 편견도 생기고 독단도 생기고 시시비비가 일어난다. 이러한 병들을 고치는 데 무슨 약이 필요할까? 바로지혜라는 것이다.
지식은 사물을 알게 하지만 지혜는 먼저 내가 나를 알게한다. 지혜는 스스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치수를 읽게 하지만 지식은 스스로를 과신하게 한다. 아는 것이 병이란 말이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나 지혜는 나를 분별하게 하여 설 자리를 알게 한다.
공자는 守分(수분)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분수를 지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분별은 시비를 가리기 위한 분별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느껴보고 생각할 것이며 이해하고 판단할 것이란 점에서 수분인 것이다. 이러한 수분은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나를 알게도 하고 돌이켜보게도 하고 반성해 보게도 한다. 되돌아볼 줄을 안다는 것은 옛것을 돌이켜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옛것이 선한 것이면 택하고 악한 것이면 버릴 줄 알 때 사람은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된다. 우쭐해 하는 것보다 뉘우쳐 보는 경우가 사람을 훨씬 더 영글게 하는 법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자신을 자신이 분명하게 알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겸허하며 스스로 정직하다. 공자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읽어 보게 한다.
(공자의 말씀)
나라고 해서 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은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아 배워 알게 된 사람일 뿐이다. 이렇게 공자는 살폈다.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학문을 두고 말한다면 나도 남만 못하겠는가? 그러나 군자의 길을 실천하는 것이라면 나는 아직 만족스럽게 이룩하질 못했다. 이렇게 공자는 살폈다.
돈밖에 모르는 사람은 돈에 눌려 질식하고 권력밖에 모르는 사람은 권력의 종이 되거나 놀아나 망신을 당한다 . 명예나 출세만 탐하다 보면 사람이 추해져 길거리의 개들도 물려고 덤빈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면 낭패를 당하게 마련이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선 누울 때와 설 때를 알아야 한다.
두루 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홀로 사는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을 잘 어울리게 할 줄을 알아야 한다. 맨밥은 목이 매여 먹을 수가 없는 것이고 싱거워도 침이 말라 입 안에서 넘어가지 않는 법이다. 어디 요리에만 간이 맞아야 하는가. 살아가는 일에도 간이 맞아야 한다. 너무 되어도 안되고 너무 물러도 안되며 너무 맵거나 짜거나 시어도 안된다. 맛있는 음식이 식욕을 돋구듯이 맛있는 삶 또한 살맛을 낙게 하는 법이다. 살맛은 어디에 있을까? 공자는 시에 있고 예에 있으며 악에 있다고 밝힌다.
시는 살맛을 낸다. 살맛을 내는 것을 흥이라고 한다. 흥이 나면 노래도 되고 춤도 된다. 시는 삶을 만나 홀로든 더불어든 어울리게 한다. 사람은 무엇인가와 어울리고 싶어 말을 해야 하고 노래를 불러야 하며 춤을 추어야 한다. 공자는 이를 일러 `詩於興(시어흥)`이라고 했다.
예는 살맛을 맞춘다. 맛이 넘쳐도 탈이고 처져도 탈이다. 너무 짜면 쓰고 너무 싱거우면 심심하다. 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을 맞추어 준다. 가족의 입맛에 따라 간을 맞추느라 부엌의 어멈은 음식마다 손맛을 더한다. 그러면 음식을 장만한 어멈은 맛있게 먹는 가족들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그 어멈이 짓는 미소 같은 것이 사회에 있게 하려는 것이 바로 예인 것이다. 이러한 예를 떠나지 말고 지키라는 말을 공자는 `立於禮(입어예)`라고 했다. 樂(악)은 살맛을 더한다. 시간에 맞추어 들어올 남편을 위해 된장찌개를 끓이는 아내의 마음 같은 것이 악이다. 집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기쁘게 해주어야지 다짐하면서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하는 남편의 마음 같은 것도 또한 악이다. 사랑을 주고받는 부부처럼 이 세상을 노닐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악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악은 나하고 너를 우리가 되게 한다. 악이란 맹물에 꿀을 타는 것과 같다. 삶을 꿀맛처럼 달게 하는 것을 공자는 `成於樂(성어악)`이라고 했다.
(공자의 말씀)
시로써 감흥을 일으키고 예로써 행위를 세우며 악으로써 마음을 완성시킨다고 공자는 밝혔다.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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