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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올인’ 실제주인공 차민수씨 |
| 작성자 |
이병현 |
온통 노름판에 들뜬 세상이다. 복권·마작·경마는 물론 개·닭싸움에까지 돈이 걸린다. 심심풀이로 화투판에 끼어들었다 가정을 망친 경우도 한둘이 아니다. 어쩌면 끊임없이 선택의 주사위를 던져야 하는 우리의 인생 자체가 노름인지 모른다. 국가간의 전쟁조차 하나의 도박이라지 않는가. 미국을 오가며 활약중인 프로 갬블러 차민수(車敏洙·52)씨. 요즘 방영중인 TV드라마 ‘올인’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그로부터 ‘노름판 철학’에 대해 들어보았다. 만난 장소는 서울 영등포시장 근처의 ‘올인’ 다방. 이름에서부터 그가 직접 운영하는 다방임을 알 수 있었다.
“한탕을 노리고 도박에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나 비슷해요. 프로들도 철저한 노력과 준비가 없이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오락이나 흥미 차원에서 가볍게 털고 일어날 자신이 없다면 아예 손대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각종 복권의 ‘대박 신드롬’과 학교 뒷골목에서도 어린애들의 콧물 묻은 잔푼을 욹어내려는 온갖 투전판이 벌어지는 세태를 그는 맘껏 비웃는다. “주식도 따지고 보면 투기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나름대로 분명한 선을 그었다.
노름판을 비웃든지 찬양하든지, 적어도 그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지난 경력이 그것을 말해준다. 1984년 본격적으로 포커판에 뛰어들어 세계대회에서 두차례나 우승한 주인공.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가 주유소 직원, 슈퍼마켓 점원 등 다양한 일을 거친 끝에 마지막으로 선택한 ‘직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험란하고도 짜릿했던 사건들이 어디 한둘에 그치겠는가. 최근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직접 ‘로티플’(에그북스)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미국에서 그는 ‘지미 차’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LA와 라스베이거스에 저택을 소유하고 있으며 벤츠 등 고급 승용차 3대를 굴리고 있다. 하지만 처음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이런 유별스런 운명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누군들 짐작이나 했을까. 그가 군복무를 마치자마자 홀로서기를 배우도록 미국으로 보낸 것은 모친(이기련·84)이었다. 영등포 경원극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 환경에서 동국대에 입학하자마자 피아트 승용차를 몰고 쏘다니던 그를 아직 철부지로 여겼던 때문이다. 유복자로 태어났기에 안쓰런 마음이 더했을 것이다.
그동안 카지노에서 과연 얼마나 벌었을까 궁금했다. 그는 “겨우 먹고 살 만한 정도”라는 엄살섞인 표현으로 비켜갔지만, 한때 연간 1백만달러 넘게씩 벌었다는 것이 주변의 얘기다. 다만 “요즘도 세금 납부액이 10만달러 정도”라며 “이만큼 내는 사람은 미국 사람 중에서도 0.04%밖에 안된다”고 털어놓았다. 카지노 수입 세율(39%)을 감안하면 대략 30만달러 안팎의 수입임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대부분 복지재단과 학교에 내놓고 있어 남들 생각만큼 챙기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어차피 노름이란 본전에 망한다는 ‘도깨비 살림’이 아닌가.
오히려 그는 그렇게 화려한 뒤편에 도사린 도박의 유해성을 강조하려 들었다. “포커 게임만 해도 상대방을 속여먹는 방법이 무려 3,000가지에 이르기 때문에 알고보면 정말 무섭다”면서 짐짓 정색했다. 멋모르고 끼어들다간 맨몸으로 시베리아 벌판에 나서는 꼴이라는 비유가 실감난다. “바둑은 실력에 따라 접어주지만, 노름판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초짜’는 당연히 고수의 노리개감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는 한국기원 소속 전문기사(프로 4단)이기도 하다. 얘기 도중 포커와 바둑을 곧잘 비교했다.
포커판은 왜 허황되고 무서운 것일까. 무엇보다 게임이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 일반적인 ‘스터드 게임’만 제대로 배우려 해도 꼬박 1년쯤 걸린다”며 “보통 사람들은 대학 4년 동안 공부한다 해도 10여가지 게임을 모두 깨우치기 어렵다”고 그는 단언한다. 포커가 확률 게임이라는 것은 기본 상식. “세계적인 포커꾼 중에 수학 천재들이 수두룩하다”니, ‘직업 포커꾼’으로서 은근한 자랑으로 들린다. 그렇다고 머리만 좋아서도 안된다. 상대방의 표정과 패를 읽어낼 수 있는 순발력이나 판단력이 모자라면 끗발에서 밀리기 십상이다. “고수들이 슬며시 약을 올리면서 끌어들여 한방에 끝장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했다.
그가 포커에 뛰어든 것은 실의에 빠진 이민생활의 와중에서였다. 처음에는 돈도 조금씩 모이면서 그럴 듯하게 보여지던 미국 생활은 차츰 일탈과 번민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갈등 끝에 아내와 헤어지게 되면서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했다. 재산이라곤 호주머니에 남은 18달러와 캐딜락 한대가 전부였다. 마약 중독의 후유증으로 뇌세포가 손상되어 글씨조차 읽기 어려웠던 때였다. 서울의 모친도 일부러 외면하던 절망의 구덩이에서 그를 건져낸 것은 승부사적 본능이었다. 내기바둑에서 마련한 1,500달러를 밑천으로 삼아 카지노로 무대를 옮겼다.
언젠가 캘리포니아 주립대 카지노학과의 치프 존슨 교수로부터 포커의 기본 원리를 배워두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 해설서를 쌓아놓고 밤새워 독파하는 한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다. 그가 라스베이거스에서도 손꼽히는 칩 리즈, 돌 브론슨, 자니 첸 등을 제치고 ‘넘버 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결과였다. 한창때의 승률은 91~92% 정도. 요즘도 87%의 승률을 유지한다니, 거의 눈을 감고도 긁어모을 수 있는 수준이다.
얘기를 주고받는 도중 그는 ‘도박꾼’, 또는 ‘도박사’라는 표현에 대해 못마땅한 반응을 보였다. “미국에서는 합법적인 직업으로 ‘포커 플레이어’라고 불린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하지만 포커가 결국 노름이라는 점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노름의 일반적인 범주까지 덧붙였다. “돈을 잃어서 마음이 쓰리고, 판돈이 수입에 비해 지나치며, 밤새워 매달려 생활의 리듬이 깨지면 분명히 노름”이란다. 스스럼없는 웃음이 자신의 지난 모습을 더듬는 것은 아닐까.
그를 설명하면서 바둑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일찍이 대학시절 국내 아마바둑 최강 자리에 올라 한·일 대항전 대표선수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74년에는 바늘구멍 같다는 입단 관문을 뚫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역시 타고난 승부사인지 모른다. 그러나 얼굴과 말투에서 날카로운 모습은 거의 엿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드러운 편이다. “포커판에 앉아서도 늘 그 모습, 그 얼굴을 유지한다”니 ‘포커 페이스’란 바로 그런 것일까.
지난 89년, 90년 미주 대표로 후지쓰배 바둑대회에 참가해 연달아 8강에 올랐던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국내 무대에서 잊혀졌던 그의 이름이 새롭게 알려진 것도 그때였다. 그는 “요즘은 시간이 없어 국내 타이틀전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으며 가끔씩 인터넷 바둑을 즐기고 있을 정도”라고 밝혔다. 포커와 바둑의 공통점을 물었더니 “모든 게임은 정신자세와 승부의 호흡이 중요하다”며 그런 점에서 서로 통한다는 답변이다. 포커가 익히기 어려운 만큼 바둑 역시 마찬가지. “누구나 카지노 선수로 성공할 수 없듯이 조훈현·이창호의 바둑책을 몇권 읽었다고 모두 프로 기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잖느냐”고 했다.
그는 바이올린·피아노·기타 연주와 쿵푸(7단), 당수(초단), 표창 던지기, 당구(500점 실력) 등에도 다양한 취미를 갖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모친의 극성스런 보살핌 때문이었다. 미국에 첫발을 디뎌 주유소 직원으로 취직했을 때 돈을 안내고 도망치려는 불량배들을 혼내줬으며, 마피아 경호원을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무예 실력 덕분이었다. 최근에는 영등포시장 근처에 쿵푸 도장까지 새로 차렸다. 그밖의 취미를 들자면 30년 전부터 즐기는 골프(핸디캡 110). “결코 잘 치는 편은 못되지만 가끔씩 즐긴다”며 웃어댔다.
스스로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갈수록 마음의 여유가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 “젊었을 때는 ‘헝그리 복서’ 기질 탓인지 지고는 밤잠을 못 이뤘으나 요즘은 얻어맞고도 살고 지고도 산다”는 것이다. 웬만하면 아예 남하고 부딪치지 않으려 든다. 생활의 신조를 부탁했더니 “자신에게 엄하고 남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라”는 모친의 평소 가르침을 들었다. 자신에게 엄하다는 것. 포커판이나 바둑판을 떠나서도 모든 인생사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겸손함, 절제심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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