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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선택 |
우리는 헤어진 후에 가끔 전화나 문자 메시지로 서로의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마티즈를 볼 때마다 은색 마티즈를 운전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소식이 더 궁금해지고 보고 싶어지는 감정이 솟아나곤 한다.
그녀가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 경기도에 있는 운전학원을 다닐 때 드라이브 겸 데이트 겸 내 차 실버 투스카니로 태워 주었던 몇 날들. 이윽고 운전면허를 따고 나서 ‘자기야, 나 무슨 차 살까?’하고 여러 번 물어 보다가 내가 싫다고 하는 차를 덜컹 사버리고는 나한테 그 사실을 숨겼던 몇 날들. 그녀가 나한테 자기 차를 처음으로 보여 준 것은 아파트에서 주차를 하다가 뒷범퍼에 흠집을 내고 난 다음 날.
그런 날들의 추억이 되살아 난다. 왜 하필이면 마티즈를 샀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은색을 고른 이유에 대해서는 ‘자기 차 색깔하고 똑같은 색깔을 사고 싶었어’라고 했던 그녀. 그녀의 부모님은 ‘젊은 여자애가 왠 영감색깔을 골랐냐?’고 핀잔을 주었다지만 그녀는 은색 마티즈가 예쁘다고 좋아라 했다. 나랑 데이트할 때마다 타고 다녔던 투스카니의 은색이 마음에 들었다기 보다는 나를 좋아하다 보니까 우리 둘의 차 색깔이 똑같아야 한다는 뭐 그런 되지도 않는 일치감을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여간에 나는 지나가는 마티즈만 보면 그녀가 아직 은색 마티즈를 몰고 다니는지 궁금해진다.
마티즈 만큼이나 깜찍하게 작았던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어도 행여 헤어진 이후에도 껄떡거린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보고 싶을 때마다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그냥 얼굴 한 번 보자고 전화해도 이런 저런 핑계로 재회를 회피하는 쪽은 항상 그녀였으니까…
그러다가 내가 다니는 회사가 그녀의 활동무대인 송파구로 이사했다. 주말마다 그리고 가끔은 주중에도 그녀를 보기 위해서 실버투스카니를 몰고 왔던 그 동네로 매일 출근을 하다 보니 그녀가 보고 싶어지는 건 당연했다. 전화를 걸었다.
“야, 우리 회사 이사했다, 송파구로.”
“어? 그래? 한 번 봐야겠네?”
그녀가 먼저 만나자는 말을 하다니 의외였다. 그녀도 한때의 옛정을 못잊어 하고 있는구나 생각했다.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그녀가 우리 회사 건물로 오겠다는 건데 지하철역 사거리에서좌회전해서 병원쪽으로 가다가 U턴을 해서 오라는 말을 너무도 잘 알아 듣는 그녀. 하기야 이제는 길눈이 트일 때도 되었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날 퇴근 무렵에 이슬비가 오고 있었다. 회사 건물 뒤쪽 이면도로에 주차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그녀의 휴대폰을 받고 나서 아무리 찾아 보아도 내 눈이 익은, 그 동안 그렇게도 생각을 떠올려 보았던 은색 마티즈는 보이질 않았다. 이제 이슬비에 젖어 버린 어둠이 그녀의 차를 찾는데 방해까지 놓고 있었다. 또 휴대폰을 걸었다.
“야, 도대체 너 어디니?”
“여기 있잖아, 무슨 협회라는 간판이 보이네.”
“엥? 그 건물 앞에는 은색 SM 밖에 없는데?”
“그래. 비상등 켜 있지?”
그녀가 차를 바꾸었다.
“언제 바꿨냐?”
“어, 벌써 세 달 됐어.”
“그래? 돈 좀 벌었나 본데?”
“벌기는 뭐… 마티즈 판 돈으로 계약 걸고 뽑은 거야. 할부로.”
“할부면 어때, 다들 그렇게 사던데 뭐.”
“이거, 사실은 여기 옆 건물에 있는 영업소에서 살 뻔 했어.”
“살 뻔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으응. 희선이랑… 자기 희선이 알지? 걔랑 여기 지나다가 SM3 판촉한다고 해서 들어 갔었어. 그래서 영업사원이랑 얘기하고… 견적을 좀 내달라니까 지금 당장 필요하냐고 묻길래 그렇게 급한 건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다음 날 아침까지 견적 뽑아서 연락 주기로 했거든? 그런데 다음 오후가 되도 연락이 없는 거야. 그래서 전화를 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까, 바빠서 아직 견적을 못 뽑았다는 거야. 우습지 않냐? 자동차 영업사원이 뭐 때문에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바쁘다고 차 사겠다는 고객한테 견적을 못 내줄 정도로 바쁘다는 게 말이나 되냐구.”
그녀의 수다는 여전했고, 단 몇 초 만에 몇 개월의 세월을 후다닥 훑고 지나갔다.
“네가 차 안 살 줄 알았는가 본데? 아니면 깜빡 했던지”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어쨌든 그때 기분 꽝이었어.”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인터넷에서 상담해달라고 했더니 총알처럼 찾아 오던데?”
“푸하하. 여기 영업사원, 실적 놓쳤네. 사겠다고 찾아온 고객도 쫓아 버리다니 바보다 바보.”
“더 웃긴 건 한 두 달인가 지나서 전화 온 거 알아?”
“뭐래?”
“아직도 견적이 필요하냐는 거야. 뭐 그런 영업사원이 다 있냐…”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
“저 차 샀어요 그랬지.”
“그랬더니?”
“뭘 샀냐고 그러더라.”
“그래서?”
“SM3 샀다고 그랬지. 그랬더니 알았어요 하고 끊더라. 두 달 동안 연락 한 번 없다가, 치~.이 차 영업사원은 한 달에 두 세 번은 문자가 와. 오늘도 비가 오니까 야간운전할 때 조심하시라구 문자를 보내 왔어요. 아참! 자기야. 오늘이 우리가 헤어진 지 딱 2년 되는 날이라는 거 알아?”
그녀와 사귈 때에도 그녀는 만나는 날마다 우리가 만난 지 몇 일이 지났다는 걸 말했었다.휴대폰에 D-Day 스케줄을 입력해 놓고 확인하는 걸 즐기는 듯 했다. 그러는 그녀가 나는 좋았었다.
“야, 너 남자 생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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